산행 이야기

월출 소회 (月出 所懷)

레드얼더 2015. 12. 26. 20:38

한 해의 끝자락이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내 인생에 있어서 또 한 해가 비워진다.
하늘의 뜻을 깨닫는다는 지천명을 넘긴지 몇 해 건만, 마음이 소슬해지는 걸 보면 여전히 비우고 지움에 서툰가 보다.


산행일시: 2015년 12월 25일 (금)
산행지: 월출산 천황봉 (809 m) 산성대 코스
산행코스: 산성대 주차장 - 광암터 - 천황봉 - 광암터 삼거리 - 바람폭포 - 천황사지구 주차장
산행거리: 6.9 km
산행시간: 4시간 43분





크리스마스 아침, 월출산 산성대 코스를 오른다.
산성대 코스는 오랫동안 막혀있다 최근에 열린지라 오늘 처음 밟는다.





월출은 내가 무등 다음으로 사랑하는 산이다.
무등에서 걸음마를 뗀 다음 오른 첫 산도 월출이었다.

한여름, 나홀로, 그것도 500 ml 물병 하나만 달랑 들고 도갑에서 천황까지 종주를 했었다.
물론 거의 죽다가 살아났었고...





그 뒤로 지금까지 매년, 못해도 서너 차례는 월출에 올랐다.
도갑사에서 올랐었고 천황사에서도 올랐었으며 금릉 경포대에서 오르기도 했다.
설날 아침 성묘를 마치고 올랐었고 한가위날 새벽 보름 달빛을 벗삼아 올랐다.





따사로운 햇살이 마치 봄날같기만 하다.
날이 온화하다 보니 한겨울인데도 은천계곡의 물소리는 우렁차다.
천황봉에서 발원한 은천계곡의 물길은 기찬랜드로 이어진다.






고인돌 바위는 낯이 익다.
산성대를 먼저 밟은 들꽃 친구가 보내준 사진에서 이미 마주쳤기 때문이다.
내가 여길 올 걸 뻔히 알면서도 풍경사진을 잔뜩 보내다니, 참 고약한(?) 스포일러다.^^

별다른 특색이 없던 산성대 코스의 풍경이 고인돌 바위를 지나면서 확 달라진다.





작년 이맘때쯤 한 토요산악회와 인연을 맺었다.
비좁은 24인승 미니버스로 찾았던, 토요산악회와의 첫 산행지도 월출이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오늘 홀로 여기 월출을 오르면서 올 한 해를 갈무리하고 있다.





수 많은 기암괴석은 올 한 해동안 나를 스쳐 지나친 얼굴들이다.
긴 스침인 마주침도 있었고 스친 것 조차도 모르고 지나친 찰나의 스침도 있었을 것이다.

스침의 시간이 반드시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찰나의 스침일지라도 내가 그를 기억하면 그가 내게 남을 것이고
긴 마주침이라도 내가 그를 잊는다면 그는 내 기억에서 떠난다.





그러고보니 들꽃 친구도 올해 마주친 얼굴이다.
석달 전 장불재에서 우연한 마주침을 갖은 뒤로 간간히 하지만 꾸준히 스치고 있다.
이 친구는 어떤 얼굴을 가진 바위일까?






광암터에 다 와서, 그러니깐 암벽에 넉줄고사리 줄기가 붙어있는 지점에서 국립공원 직원들을 맞닥뜨렸다.
거참 사람들, 아무리 오늘 여기에 온다는 언질을 줬더라도 굳이 마중까지 나오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잖는가?





이틀 전 월출산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었다.
금요일엔 기온이 높아 결빙 우려도 해소되는데 그래도 통제하느냐고...

이미 공지된 사항이라 어쩔 수 없단다.
기어이 간다면 과태료가 얼마냐고 웃으며 물었더니 10만원이란다.





천황봉이다.
어디에서 오르더라도 스치게 되는 천황봉만큼 월출에서 익숙한 곳은 없다.





지지난 주말 오랜만에 한 일요산악회에 들렀다.
연말이니 인사나 나누자 싶어서다.
토요산악회를 찾은 뒤로는 들른 적이 없었으니 꼬박 일 년 만이었다.

이 일요산악회는 작년 한해동안 내게 있어 월출의 천황봉이었다.





여전히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고 그들은 나를 기억하고 반겨줬다.

한때 그들과의 스침이 힘겨웠던 적이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불편함과 버거움은 결국 나를 도피 아닌 도피로 내몰았었다.






천황사지구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자주 오르내리는 길이지만 오늘은 또 다르다.
길은 하나지만 내 마음 속에 매번 다르게 투영되기 때문이리라.





식당에 들어와 시간을 보니 3시 1분 34초.
김밥 한 줄을 사온다는 것이 깜빡하고 빈 손으로 산에 올랐더니 허기가 심하게 진다.
산채비빔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목욕탕에 들러 씻은 다음 고천암으로 차를 몬다.

이번 연휴에는 독거노인 신세라 집에 가봐야 반겨줄 사람없다.
내자는 서울사는 딸들이 보고 싶은 장모님을 따라 서울에 갔고 아들은 군생활 중이니...





철새들의 군무를 보러왔으나 철새들은 움직일 줄을 모르고 앙상한 억새만 바람결따라 흐른다.





기다림 속에 고천암호의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
그리곤 곧 올해도 저물겠지.


내년 병신년(丙申年)엔 다들 행복하시라.


'산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수초 꽃이 피었단다  (0) 2015.12.30
1187번 꽃버스  (0) 2015.12.26
꼬까신 신고 오른 서석대  (0) 2015.12.19
순창 채계산  (0) 2015.12.13
해남 두륜산  (0) 2015.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