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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교를 두고 유교만 말하는가?
김상봉
나는 자기의식 속에서 나 자신을 정립한다. 이것은 내가 나를 반성적으로 의식할 때, 비로소 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잠들었을 때,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는 없다. 그때 있는 것은 주체로서의 내가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주체의 객체인 '그'가 있을 뿐이다. 그런 한에서 나는 나를 의식함으로써 주체로서의 내가 된다.
이런 사정은 개별적 주체로서의 내가 아니라 민족 전체로서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오직 우리가 우리를 반성적으로 인식할 때, 주체로서의 '우리'가 있을 수 있다. 자기정체성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없을 때, 있는 것은 능동적 주체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다른 민족에 의해 규정되는 3인칭의 객체인 '그들'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작업은 한 민족의 실체적 정립을 위한 근원적 실천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민족은 같은 땅에서 같은 말을 쓰면서 살아도 '그들'의 무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회상(回想)은 반성의 본질적 계기이다. 왜냐하면 반성이란 정신의 자기복귀이기 때문이다. 나는 반성적 자기의식 속에서 나를 정립하되, 언제나 자기복귀 속에서 나 자신을 정립한다. 그런데 내가 회상 속에서 나에게로 되돌아갈 때, 회상되는 나는 언제나 과거의 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과거의 나를 매개로 해서만 나를 끊임없이 새로이 정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회상 속에서 비로소 머무르는데, 이 머무름이 곧 나의 있음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경우에도 반성적 자기의식은 언제나 회상을 통해 일어난다. 여기서 회상의 대상이 바로 민족의 역사이다. 따라서 우리의 집단적 자기의식은 언제나 우리의 과거와 전통에 대한 역사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까닭에 전통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정립하고 형성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이란 하나의 단순한 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역사도 근대의 물리학자나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시간처럼 1차원적인 선, 오직 한가닥 실처럼 이어져오는 그런 단선적인 과정도 아니다. 그것은 열린 지평이며, 우리가 머물렀던 들판이다. 그 너른 들판을 되돌아 보면서 어디를 향해 눈길을 주느냐 하는 것은 각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시대정신에 의해 규정된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에 대한 망각을 반성하고, 우리의 역사와 정신적 전통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되돌아 보려는 의욕을 갖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반성적 자기의식은 맹목적인 것일 수 없고, 민족의 역사의식이 일사불란한 유행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우리의 전통사상과 문화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노라면,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맹목적 유행이 전통에 대한 담론을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의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는 과거의 전통을 되돌아 보면서 어디를 향해 눈길을 주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이렇게 물을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유교이다. 마치 우리의 지성사를 지배한 이념은 오직 유교밖에 없다는 듯이, 많은 사람들이 전통사상을 유교와 동일시한다.
우리의 전통사상 속에는 유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장사상도 있고 불교도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마치 유교가 그 모든 전통사상의 대변자요, 유일한 상속자인 것처럼, 전통 하면 유교만을 떠올린다. 특히 불교와 유교의 관계에 대해서 보자면, 우리 역사 속에서 이 두 사상이 공존했다는 사실 외에는, 본질적으로 유사성보다는 차이가 더 크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마치 유교가 우리의 모든 전통사상을 자기 속에 포괄하여 종합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전통과 유교를 동일시한다.
이것은 철학에 대해 전문적 소양을 갖지 못한 통속적 문필가들에게 매우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이들에겐 동아시아적인 것 혹은 한국적인 것은 유교적인 것과 거의 동의어가 되어버린다. 그들은 같은 중국철학 내에서도 노장사상과 공맹사상이 얼마나 다른지 모르며, 더 나아가 유교와 불교가 얼마나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정도로 이질적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동아시아 나라들을 아무 생각 없이 "유교권 국가"라고 규정한다.
사람들이 동아시아 국가들을 이처럼 유교권 국가라고 단순화시켜 규정할 때, 사람들은 좋든 싫든 유교는 우리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때 사람들은 유교만이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차피 우리 전통의 뿌리는 유교이므로, 설령 유교 문화가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유교를 버릴 수도 없으므로, 밉든 곱든 유교문화를 안고 이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나는 반성적 자기의식 속에서 나를 회상함으로써 나 자신을 또한 정립하고 실현한다. 마찬가지로 역사는 과거로 되돌아감으로써 미래를 향해 전진한다. 그런 까닭에 만약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전통이 오직 유교뿐이라면, 우리는 좋든 싫든 유교 속에서만 미래의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에겐 유교밖에 없는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에겐 불교가 있었고 최근에는 동학이 있었다. 물론 철학적으로 퇴계는 훌륭한 사람이고 의기(義氣)에 있어서는 사육신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그러나 유, 불, 선을 아우른 최제우가 주자의 아류인 퇴계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며, 민중을 위해 자기를 버린 전봉준이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큰 나라에 대해 예의바르고 비굴했던 김부식보다 긍지높은 자유인인 일연(一然) 선사가 모자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반성 없이 유교를 우리 전통 사상의 원형적 실체인 것처럼 유교와 전통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런 맹목은 우리의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다른 전통에 대해서 부당한 차별이며, 더 나아가 우리 역사의 참된 진보를 위해서 매우 염려스런 일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역사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먼저 회상해야 할 전통이 불교이겠는가 아니면 유교이겠는가? 어떤 철학도 역사적 문맥을 떠나서 무조건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교나 유교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에 우리는 불교를 열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나,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우리의 지식인들은 불교를 격렬히 비판하게 되었다. 같은 불교를 놓고도 이렇게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변해 가는 역사 속에 사는 존재인 까닭이다. 이런 사정은 유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조선시대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지배 이념이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지식인들이 유교에서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보았듯이 오늘 우리도 유교에서 우리 시대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변화된 시대를 이끌어 가기에는 유교가 내세우는 삶의 이상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유교란 예의를 설교하는 계급사회의 노예도덕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적 욕망이든 사회적 질서든, 주어진 현실을 원칙적으로 긍정하고 인정하는 보수적 현실주의의 이데올로기이며, 인륜적 공동체보다 자연적 공동체인 가족을 더 중요시하는 반사회적 세계관이고, 마지막으로 유교는 전인적(全人的) 사대부의 이상을 설교하면서 지식과 권력 그리고 재산과 예술적 교양 등, 삶의 모든 가치를 한 사람이 독점하려는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속물적인 인생관이다. 적어도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 유교문화의 현주소인 것이다. 그리고 불교도든 기독교인이든 아니면 그 누구이든 오늘날 우리 모두가 이런 식의 속물적 문화에 사로잡혀 사는 한에서, 우리나라가 유교국가라는 판단은 옳은 판단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모두가 사로잡혀 있는 유교적 삶의 형식을 극복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반해 불교는 근원적 자유의 가르침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했던 자유조차도 불교가 가르치는 자유에 비하면 불철저하다. 그들은 전제군주 앞에서의 자유를 말했다. 그러나 불교는 신(神)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긍지높은 수행자가 인간 앞에서 비굴해질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의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 자유에 대한 의식이다. 그리고 불교는 유교적 삶의 방식에 의해 비굴해질 대로 비굴해진 우리의 의식을 자유로운 삶을 향해 일깨울 수 있는 이상적 전통이다.
둘째로 불교는 감성적 현실을 유일무이한 현실이라 절대화시키지 않는다. 모든 현실은 동시에 비현실이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자연과 현실을 절대화시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살되 자연을 초월하고 현실에 살되 현실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여기에 모든 이상주의의 바탕이 있다. 이상은 현실을 넘어선 곳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불교는 자발적 절제를 가르친다. 인간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이다. 그러나 단지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동물적 욕망에 대하여 아무런 저어함도 없는 문화는 천박함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건강한 인생관 속에는 언제나 감성적 욕망에 대한 금욕적 대항의지가 살아 숨쉬는 법이다. 수행자에게 무소유와 금욕적 삶을 요구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천민 자본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깨우칠 수 있는 유일한 내재적 대안이다.
네 번째로 불교는 참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족을 떠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참된 삶을 얻기 위해 세속적 인연, 자연적 인연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혈연, 지연, 학연 등, 모든 종류의 유사가족의 인연에 기대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우리에게 불교는 출가(出家)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더불어 만들어가야 할 극락세계는 우리가 저마다의 집을 박차고 떠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윤회사상은 생태적 위기에 직면한 온 인류에게 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관이다. 식탁 위에서 아직도 꿈틀거리는 낙지 다리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입에 넣는 우리에게 불교는 모든 생명이 보편적 윤회의 사슬 속에서 하나임을 깨우친다. 서양의 철학이나 종교에서 이 이상의 생명존중사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모든 것을 돌이켜 보면 볼수록, 불교의 가르침은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
역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전통이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통은 마지막에는 반드시 전통에 의해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전통이 극복되어야 할 전통이며, 어떤 전통이 극복하는 전통이어야 하겠는가? 답은 분명하다. 불교가 유교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우리 시대 시대정신의 피할 수 없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v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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