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밤
여름, 유럽의 하루는 길다.
길어도 너무 길다.
아침 5시면 환해지고 밤 10시가 되어야 어둠이 내린다.
프랑크푸르트 작센하우젠에서 조금만 더 놔두면 식초가 될 것 같은 맛의 애플사이다를 두 잔 마시고 돌아 오는 길.
밤 9시 40분인데 이제서야 슬슬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다.
뮌헨의 주경도 감상하고 야경도 감상하자 싶어 느즈막히 6시 20분 쯤에 올림픽 타워에 올랐다.
대충 30분 정도 지나니 구경도 다하고 사진도 다 찍고 할 일이 없다.
이제 어두워지길 기다려야 한다.
7월 초순이면 한여름이라서 더워야 하는데 저녁이 되니 춥다.
춥고 배도 고프니 시간도 참 더디게 간다.
야경이고 뭐고 그냥 쉬고 싶은데 갈 곳이 마땅치 않다.
호텔은 체크 아웃했고 짐은 뮌헨 중앙역 라커에 보관되어 있다.
밤 11시 30분에 베니스행 야간 열차를 타서 침대에 몸을 뉘일 때까지는 딱히 갈 곳도 없다.
9시가 가까워지니 열명 남짓의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올라왔다.
9시 17분 25초.
이제야 해가 지평선에 한 발을 걸친다.
결국 해는 졌지만 내 실력탓으로 멋진 뮌헨 야경은 건지지 못했다.
노출시간을 좀 더 줬어야 했었나? 하지만 실제 야경은 이보다 더 어두웠었고 나는 야경 촬영할 때 지나치게 과한 노출은 삼가는 편이다.
베네치아행 기차에서 지낸 밤.
2층 침대는 편했고 방에는 간이 세면대도 있었다.
또 각 차량마다 공용 화장실 뿐만 공용 샤워장까지 갖춰져 있었고 말이다.
저렴한 5~6인 칸에서는 소매치기를 당할 우려가 높다 하여 2인용 침대칸을 빌렸었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소매치기 범죄는 단지 우려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로마 지하철안에서 한 한국 여학생이 방금 지갑이 없어졌다며 울먹이는 소리를 들었고
파리 지하철역에서는 내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나한테 들킨 흑인 소매치기를 만났었다.
몇장 찍다가 포기했다.
선상에서 즐기는 베네치아 야경은 좋았지만, 흔들리는 배 위에서 야경을 찍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로마 야경 첫날.
지나는 차도 없고 사람도 많지 않아서 쾌적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사진이 별로 인 것은 내 실력 탓이지 절대로 주변 환경 탓은 아닌 그런 날이었다.
콜로세움 야경을 끝으로 지하철 역에 들어섰는데, 직원은 없고 신용카드는 커녕 지폐조차 거부하는 자동판매기만 우릴 반긴다.
다른 승차권 자동판매기도 마찬가지인데, 호주머니에 동전은 없고 근방에는 문을 연 가게도 없다.
결국 콜로세움 주변에 있는 장난감 행상인한테 싸구려 장난감을 하나 사고 남은 거스름 돈으로 표를 살 수 있었다.
로마야경 둘째날
천사의 성 야경 촬영을 마지막으로 아들한테 삼각대를 뺐겼다.
이제부터는 내 물건을 다른 사람한테 빌려서 써야만 한다.
술이나 저녁 식사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스위스 인터라켄의 밤에는 별로 할게 없다.
게다가 첫날 빼고는 나흘 내내 비가 내렸으니 밤에 밖에 나갈리는 만무.
퐁듀 먹으러 한번 나간 것을 빼곤 날마다 일찍 자리에 들었다.
치즈 퐁듀는 즐겼고, 두번 째로 나온 퐁듀 시누아즈(스프 퐁듀)는 생각없이 삼켰으며 세번 째로 나온 과일 초콜릿 퐁듀는 억지로 먹어봤다.
에펠탑 야경 촬영 포인트라는 샤이요궁(Palais de Chaillot).
도떼기 시장도 이런 도떼기 시장이 없다.
나처럼 야경을 보겠답시고 모인 사람들이 얼추 4~500명 쯤... 한복판에서는 비보이들이 공연중이다.
대리석으로 된 구조물이다보니 진동이 삼각대를 통해서 그대로 카메라에 전해지는 느낌이다.
파리에서 부터 느낀 것이지만 체력이 바닥났다.
어서 빨리 호텔로 들어가서 맥주 한잔 하면서 쉬고 싶다.
저 녀석은 힘들지도 않나?
아, 저 놈은 지금이 한창 때지...
아내 선물을 사려고 가게에 들렀는데, 멋진 핸드백을 어깨에 맨 아들 또래 백인여성이 들어온다.
숫기없는 줄만 알았던 아들이 대뜸 그녀한테 가더니 어디서 샀냐고 묻는데, 여자는 자신의 핸드백에 대한 관심을 즐거워하며 알려준다.
내참 저런 놈이 왜 여자친구는 없는 걸까?
백화점을 들렀다 런던 다리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피곤해하니 아들이 대충 찍더니 호텔로 돌아 가잔다.
호텔로 돌아오는 언더그라운드(지하철) 빅토리아 노선의 안내 방송 목소리가 독특하다.
오가면서 계속 듣다보니 박력있는 영국 여성의 목소리도 꽤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호텔 테라스에 앉아 산딸기 맛 애플사이다를 한잔 한다.
유럽의 여름날은 다시 봐도 길다.